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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조차도 공손하게 만든 최강의 책사 방통 - 삼국지 설민석 소개된 신통 방통
신삼국지 장비 조차도 공손하게 만든 최강의 책사 방통 - 등장
책 읽어 드립니다 삼국지 설민석 41분 8초 장면 방통 등장
41분 ~ 43분 장면에 소개된 신통방통 방통입니다 ㅎㅎ
방통이 일찍 전사하지 않고, 유비가 방통의 말을 들었다면 아마 유비는 일찍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ㅜㅜ
최고의 명장 방통의 등장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실력으로 판단해야 하는 이유.
일을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영상.
※ 위 영상은 교육용으로 제작되었으며 전체영상은 IPTV 또는 웨이브에서 시청가능합니다.
- 신삼국지 또는 삼국지 58회 영상입니다.
방통에 관한 위키백과 내용
방통(龐統, 179년 ~ 214년)은 중국 후한 말 유비 휘하의 정치가로 자는 사원(士元)이며 형주 남군 양양현 사람이다. 별호는 봉황의 새끼라는 의미의 봉추(鳳雛)이다. 인물평의 대가이면서도 제왕을 곁에서 모실 인물로 여겨졌다. 익주를 탈취할 것을 제안하여 유비의 입촉을 수행하였다. 낙성을 포위 공격하던 중 유시에 맞아 젊은 나이로 죽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추남에, 낙봉파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목차
1. 생애
1.1 작은 날개
1.2 서촉으로
1.3 상중하책
1.4 봉황 추락
2. 특징 - 인물평의 대가
3. 평가
4. 사서 외의 이야기
4.1 세설신어
4.2 삼국지연의
...
1. 생애
1.1 작은 날개
어린 시절 순박하고 둔하여 알아봐주는 이가 없었는데도 삼촌 방덕공만은 중하게 여겼다. 18살이 되어 방덕공과 친밀했던 사마휘에게 평가를 받으러 갔다. 사마휘는 영천군 사람으로 청아하면서도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사마휘는 나무 위에서 뽕을 따고 방통은 아래에 앉아 밤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사마휘는 방통을 높게 평했고 이로써 점차 이름이 알려져 남군에서 공조(功曹)로 일했다.
남군은 주유가 조인을 몰아내고 점유했다가 유비가 다스리게 되었다. 방통은 계양군 뇌양현령으로 전임됐는데 잘 다스리지 않아 면직되었다. 노숙과 제갈량은 방통을 촌구석이 아닌 주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비가 직접 만나보고는 큰 그릇이라 판단해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삼았다. 친밀하게 대우 받음이 제갈량에 버금가서 얼마 안 가 제갈량과 아울러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에 올랐다.
1.2 서촉으로
방통이 유비를 설득하길 "형주는 황폐해졌고 동쪽에는 손권이, 북쪽에는 조조가 있어 정족지계(鼎足之計), 즉 세발솥 다리의 계획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현재 익주는 부유해서 인구와 병마, 산출되는 물자가 매우 많으니 이를 취해서 대사를 펼쳐야 합니다." 라고 했다. 유비가 "현재 나에게 있어 물과 불 같은 자는 조조요. 조조가 쪼이면 나는 풀어주었고, 조조가 사나우면 나는 인자했고, 조조가 농간을 부리면 나는 진실로 대했소. 매번 조조와 반대로 행동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작은 이유 때문에 천하의 신의를 잃는 것은 취할 바가 아니오." 라고 답하자 방통은 "난세는 한 가지 방법만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약하면 겸병하고 혼매하면 공격하는 것은[3] 오패도 했던 일입니다. 어긋난 도리로 가지되 바른 도리로 다스리고, 유장에게도 의(義)로써 보답하여 큰 나라에 봉한다면 어찌 신의를 저버렸다 하겠습니까? 오늘 확보하지 않으면 끝내는 다른 사람의 이익만 될 뿐입니다." 라고 재차 청했다. 유비가 마침내 행하였다.
211년(건안 16년) 유비가 익주목 유장의 요청에 따라 한중의 장로를 정벌한답시고 촉으로 들어갔다. 제갈량은 남아서 본거지를 진수(鎭守)하고 방통은 유비를 수행했다. 유장이 광한군 부현으로 나와 환대하였다. 장송, 법정, 방통이 병력을 소모할 것 없이 여기서 바로 유장을 잡자고 권하였지만 유비는 이제 막 타국에 와서 은혜와 신의를 드러내지 못했다며 중대한 일이므로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1.3 상중하책
유장은 성도로 돌아가고, 유비는 가맹현으로 올라간 후 한중을 치려 했다. 방통이 유장부터 무찔러야 한다며 상·중·하책을 제시했다. “상책, 은밀히 뽑은 정예병들을 데리고 밤낮으로 내달려 곧장 성도를 습격하십시오. 유장은 무략이 없을 뿐더러 대비도 없을 테니 대군으로 들이닥치면 한번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중책, 양회와 고패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력한 병사로 관두(關頭)를 지키고 있습니다. 듣건대 이들은 장군을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여러 차례 간언했다 합니다. 장군께서는 그들에게 형주가 위급하여 구하러 간다 알리고 행장을 꾸려 돌아가는 척 꾸미십시오. 그들은 틀림없이 좋아하며 가벼운 차림으로 만나러 올 것입니다. 그대로 그들을 붙잡고 그 군대를 차지하여 성도로 향하십시오. 하책, 백제성으로 물러나 형주와 연대하여 서서히 일을 강구하십시오. 선택 가능한 수는 이상과 같으며 만일 망설이기만 한다면 장차 큰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유비는 중책을 추진하여 민심부터 휘어잡았다. 212년,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고 성도로 남진하였다.
1.4 봉황 추락
지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유비는 부성에서 대연회를 개최하였다. 술을 차리고 음악을 울리며 즐거워하자 방통이 “남의 나라를 침공하고 즐거워한다면 어진 사람의 군대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술에 취하여 “주나라 무왕의 군대가 주(紂)를 토벌하며 앞에서는 노래 부르고 뒤에서는 춤을 추었으니 어진 사람이 아니겠구려? 경의 말은 맞지 않소. 당장 일어나 나가시오!”라고 노여워하였다. 방통이 머뭇거리며 물러났다. 유비가 곧 후회하여 돌아올 것을 청했다. 방통이 원래 자리로 돌아와 태연히 먹고 마셨다. 유비가 방금 전에 누가 잘못했는지 물었다. 방통은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한 것이라 대답했고 유비는 크게 웃으며 처음처럼 연회를 즐겼다.
계속 진군하여 유순, 유괴, 장임이 방어하는 낙현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약 1년이 지난 214년 유시(流矢)에 맞아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비가 몹시 애석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훗날 방통의 아버지는 의랑(議郞)을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으며, 방통은 관내후에 추봉되고 260년(경요 3년)에 정후(靖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2. 특징 - 인물평의 대가
인물 평가를 잘하는 한편 인재 육성에도 힘썼다. 남군공조 시절 매양 타인을 치켜세우는 바가 실제 재주에 비해 과해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이유를 묻기에, “천하가 무너지고 아름다운 도리가 황폐화되고 착한 사람은 적고 악한 사람이 많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바야흐로 풍속과 도리를 바로 세우고자 합니다. 고운 말로 칭송하지 않는다면 그 명성이 흠모하며 본뜨기에 부족할 것이고, 흠모하며 본뜨기가 부족하다면 선한 일을 하는 자도 적을 것입니다. 뽑은 열 명 중에 다섯 명은 아니더라도 나머지 다섯 명을 얻어 세상의 교화를 높이고 뜻있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분발하게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라 답하였다. 그 명성이 오나라에 퍼졌다.
210년, 남군태수 주유가 숨을 거두었다. 그 시신을 동오로 옮기고 귀환하는데 육적·고소·전종 등 많은 사람들이 오군의 서문인 창문에 모여 전송하였다. 방통은 ‘육적은 빠른 발의 힘을 가진 말’이고, 고소는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곳까지 갈 수 있는 소’라고 평하였다. 어떤 이가 육적이 더 낫다는 뜻이냐고 물어보자 “말은 빠르더라도 한 사람만을 태울 뿐입니다. 소는 하루에 300리를 가면서 어찌 한 사람의 무게만을 나르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전종에 대해서는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는 것은 여남의 번자소(樊子昭)와 유사하며 비록 지력은 많지 않아도 역시 한 시대의 훌륭한 인물’이라 평하였다. 육적과 고소가 ‘천하가 태평해지면 방통과 더불어 사해의 인사들을 논해보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모두와 깊은 친교를 맺고 돌아갔다.
3. 평가
방덕공은 방통의 싹을 알아보고 봉추라 칭하였다. 사마휘는 방통과 면담해보고는 "방덕공은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방통은 실로 훌륭한 덕을 지녔다."라 감탄하였다. 어느 날, 유비가 사마휘에게 세상일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사마휘는 "저같이 견식이 모자란 유생이 어찌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자가 준걸인데, 근래에는 복룡(숨어있는 용)과 봉추가 있습니다."라 답하였다. 복룡은 제갈량이고 봉추는 방통이다.
방통이 오나라에 있을 때 고소가 “경은 사람을 알아보기로 유명한데, 저와 경을 비교하면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물었다. 방통이 스스로 평하기를, “세속을 도야(陶冶)하고 인물을 품평하는 것은 제가 경만 못합니다. 제왕의 비책을 논하고 의복(倚伏)의 요체를 파악하는 것은 제가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소가 그 말에 만족해하며 친근히 대했다.
유비가 방통을 뇌양현령에서 면직시키자 노숙이 유비에게 글을 보내 "방사원은 고작 백 리나 다스릴 자가 아닙니다. 치중이나 별가(別駕)를 맡겨야만 비로소 인걸의 재능을 펼칠 수 있습니다." 라 했다. 제갈량도 이에 동의하였다. 제갈량은 ‘방통과 요립은 초 지방의 우수한 인재로서 대대로 전해질 제왕의 사업을 보좌하여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라 하기도 하였다.
장존은 본래 방통과 의견이 달랐다. 전사한 방통을 유비가 찬탄하자 장존은 “방통이 비록 충성을 다했던 몹시 아까운 인물이긴 합니다만 천하의 올바른 도리는 어겼습니다.”라고 하였다. 유비는 방통이 살신성인을 이뤘다고 화를 내며 장존을 면직시켰다.
양희는 방통을 ‘미덕과 맑고 고상한 기품이 빛났다.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내놓고 가슴에서부터 충정을 발현하였다. 의리와 도덕의 모범이 되어 자신을 희생해 은덕을 갚았다.’고 평하였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인물 평가와 경학, 책모가 뛰어나 형주 사람들은 그를 고아하고 준수한 자[高俊]라 했다. 위나라의 신하들과 비교하자면 순욱에 비길 만하다.’고 했다.
부손은 방통을 "재지(才智-재주와 지략)가 뛰어난 영웅(英雄-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지만 기량(사람의 재능과 도량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불완전하다." 말했다.
... 자세히보기 : https://ko.wikipedia.org/wiki/방통
출처 : 위키백과
#컨뱅
#컨텐츠뱅크
#ContentsBank
컨텐츠뱅크- ContentsBank : ※ 본 영상은 신삼국지 드라마 58회의 일부내용을 비평과 교육 목적으로 편집하였습니다.
신삼국지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실제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전체 영상은 IP티비 또는 웨이브에서 영상을 구입하셔서 정주행 가능합립니다.
- 유튜브 처음시작할때 올린영상이라 배경음악에 크게 신경쓰지 못하고 볼륨조절 실패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
신삼국지 드라마에서 방통은 성격도 좋고 지략도 좋아 최고의 책사라고 생각합니다
정병욱 : 치통 근육통 방통
부릉가 : 그는 인재였으나 하는거 1도없이 갔습니다
다빈치 : 가히 예형 저리가라 할 정도의 망나니 성격 ㅋ
석봉원장 : 장비도 참을성이 다 있었네요
ᄏᄏ : 제갈량이 후방보급과 내정을 담당하고
방통이 전장지휘와 전선관리를 했으면 촉도 할만했는데
말만 양쪽날개라고 하고 그 인재를 재대로 관리하지못한 유비의 능력이 거기까지이기도 하고
촉에서 방통정도되는 인재를 얻기라도 했어야하는데 잃기만하고 얻은게없음
· : 간손미 어디 안가네 손건쉑ㅋㅋㅋㅋㅋㅋㅋㅋ
류재하 : 장비 : 나다 ㅋㅋㅋㅋㅋㅋ
이하하으하하하 : 비지엠 죵나 걸리적거리네 ㅋㅋㅋ
PRESSO RAISON : 방통이 낙봉파에서 안죽었으면
형주에 방통이나 공명 둘중하나는 있을것이고
그럼 관우의 뻘짓또한 예방했을테고
그렇게되면 촉이 쇠퇴하는일없었을듯
어떻게보면 유비의 뻘짓이 나비효과가됨
중국 삼국지 지략가 지력 순위 TO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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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 년도 수정★
20. 여몽
214년 여몽은 형주 공략에 나서 오나라가 장사・계양 2개 군을 영토로 편입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15년에는 합비를 공격하다가 장료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빠진 손권을 구했고, 217년에는 도독이 되어 오나라를 쳐들어온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노숙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대도독이 되었다.
219년 촉나라의 관우가 위나라의 조인이 지키던 번성 공략에 나서자 여몽은 그 틈을 타서 관우의 배후를 공격해 형주를 점령하고 관우를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여몽은 용감할 뿐 아니라 지략도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여몽과 관련해서는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고사성어도 전해진다.
중국 삼국지 지략가 지력 순위 TOP20
본 순위는 등장빈도와 활약상 중심으로 정사보다는 삼국지연의를 기반으로 만들었습니다.
6. 곽가
여포 토벌 때에는 곽가의 진언으로 여포를 생포하였다. 여포에게 패하여 조조 진영에 머물렀던 유비가 원술을 공격하러 떠났다가 이후 반기를 들자 원소가 도우러 올 것을 염려하는 조조를 설득하여 유비 토벌에 성공하였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고 양자강 건너의 허창을 습격하려 하자 곽가는 손책에게 원한을 산 사람들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된다고 예언하였고, 이내 손책은 오군 태수 허공의 자객에 의해 상해를 입고 죽음에 이른다.
조조는 그를 두고 “오직 곽가만이 나의 뜻을 잘 안다”고 말할 정도였다.풍토병으로 쓰러져 38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조조는 적벽전투에서 패배한 후 곽가의 부재에 대해 더욱 안타까와 했다고 한다.
7. 주유
손견이 죽은 후 손책을 섬겨 양쯔강 하류 지방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08년 조조가 화북을 평정하고 형주로 진격해 오자, 손권을 설득하여 군사 3만을 주면 조조를 격파하겠다고 장담하였다. 마침내 손권을 설득하여 오나라 대도독으로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여 적벽대전에서 화공으로 위군을 대파하였다. 익주를 점령하여 촉을 병합하고 조조의 위를 점령하여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주유가 구상한 천하 이분지계이다.
8.육손
어린 나이로 뛰어난 지략을 지녀 여몽과 함께 공안을 함락하고 관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뒷날 유비가 복수를 위해 군사를 동원했을 때도 노장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침착하게 작전을 짜 촉의 40여 진지를 불살라 촉의 대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이끌었는데, 모두 그의 생각이었다.
진수는 육손에 대해 “충성이 매우 지극하여 나라를 걱정하다 죽었으니 사직의 신하라고 할 만하다”고 평하였다.
9. 법정
촉나라 책사중 천상계에 속하는 제갈량과 방통을 제외하고는 가장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받는다.유비가 익주를 점령할 때 뛰어난 정치력과 상황 판단 능력으로 유비가 익주를 얻게 만드는 1등 공신이다.
조조와의 한중 쟁탈전에서도 조조가 책임자로 하후연과 장합을 두고 갔음에, 법정이 말하길
"조조가 일거에 장로를 항복시키며 한중을 평정시켰음에도 급히 돌아간것은 내부에 우환이 닥쳤을 것이며, 하후연, 장합의 재략은 우리 장수들보다 나은점이 없으니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할 수 있습니다"
라며 상중하의 계책으로써 천금같은 기회를 놓칠순 없다며 유비를 설득하며 필승을 자신한다. 정군산 전투에서 반객위주법 이라는 기책을 사용하여 하후연 참살에 결정적 공헌을 한다.
유비 진영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제갈량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육손에게 완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제갈량은 "아 법효직(법정의 자)만 있었더라도 폐하의 출정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한스럽구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10. 순유
여포 토벌, 관도 전투 등 조조의 중요한 전투 대부분에 군사로써 종군하여 조조에게 항상 적절한 조언을 하였다. 또 실제 전투에서도 관도 전투의 전초전인 백마 전투에서는 원소군의 기병대장 문추를 죽이는 공적을 세웠다. 당대 최고의 군사로써 삼국시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이라 불리우는 관도대전에서 백마, 연진, 치중, 오소 전투 등 그야말로 모든 전장에서 그 상황에 맞춰 적절한 계책을 내놓습니다.
적벽 전투에서도 순유는 적이 화공을 준비하려는 책략을 알아채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하라고 조언하였으나, 이미 승리를 자신하던 조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사태는 순유가 걱정한 대로 화공에 의해 조조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삼국지 정사의 저자 진수는 위나라 참모들을 편찬할때, 우선적으로 순욱, 순유, 가후를 한편으로 묶고, 그 다음으로 나머지 참모들을 한편에 묶습니다. 즉 이 세명을 조조군 최고의 3대 참모로 꼽은 것 입니다.
11. 정욱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던 때 순욱과 함께 견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연주에 모반의 기운이 퍼지면서 남아 있는 성 3곳을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때 그는 여포가 보낸 진궁의 공격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면서 조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된다.
이후 연주의 기반이 흔들려 심약해진 조조는 원소에게 가족들을 볼모로 바치며 밑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정욱이 이를 다그쳐 거절시키고 조조를 분발하게 만들었다. 조조에게 귀순한 유비를 미리 처치해 두라고 조언하기도 하는 등 안목있는 계책을 내놓는데, 나중에 조조가 유비에게 서주의 원술을 공격하게 하면서 병사를 빌려준 데 대해 배반할 것이라고 곽가와 함께 진언했고 이 또한 맞아떨어졌다.
12. 노숙
노숙은 일찍부터 손권에게 천하 통일을 도모하기를 권했으며, 유비와 동맹을 맺어 함께 조조에 맞설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208년 유표가 죽은 뒤에 직접 당양의 장판으로 가서 유비를 만나 동맹 체결을 주도했고, 조조가 강동을 공격해왔을 때에는 항전을 주장했다. 그리고 주유를 보좌하여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주유의 병이 위독해지자 주유를 대신해 병사들을 통솔했다. 노숙은 강릉에 주둔하다가 육구로 옮겼는데, 그가 다스린 곳은 평안하여 병사와 주민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13. 전풍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설득하여 조조의 후방을 공격할 것을 간언했지만, 원소는 아들 병을 핑계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지팡이로 땅을 치며
“대저 우연한 기회는 얻기도 어려운데, 어린아이의 병으로 기회를 잃을 줄이야! 애석하도다!”라고 하면서 원소의 무능함과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한탄했다고 한다. 관도대전에서 패하고 원소가 돌아오자 어떤 사람이 옥에 갇힌 전풍에게 원소가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왔으니 당신은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풍은 원소가 이겼으면 살았겠지만 졌으니 죽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전풍은 원소가 내린 칼로 자결하기에 앞서, 슬피 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슬퍼할 것 없다. 장부가 세상에 나와 주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다.”라고 말한 후 죽었다.
14. 저수
전풍과 함께 원소 진영 최고의 책사로 평가받는다. 전풍 등과 같이 원소가 조조보다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원소를 설득해 헌제를 업으로 맞아 제후에게 호령할 것을 권했지만, 계책을 따르지 않아 조조에게 빼앗겼다.
가장 중요한 조조와의 관도대전 중에 여러 차례 원소에게 수비에 치중할 것을 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투옥되었다. 원소가 크게 패한 뒤 조조에게 포로로 잡혔다. 조조가 두터운 예로 대했지만, 완강히 투항을 거부했다. 군영(軍營)에서 말을 훔쳐 원소에게 돌아가려다가 잡혀 죽임을 당했다.
15. 조조
종합적으로 모든 면을 봤을 때에는 삼국지 세계관의 압도적 원탑임이 분명하지만 순수 지력만을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조조를 하위에 두었습니다. 실제 조조의 강점에는 본인 스스로의 능력도 뛰어나지만 개인적으로 그를 당대 최고의 자리로 올려준 요인은 순욱, 순유, 가후, 곽가와 같이 자기주장 강하고 누구 앞에서도 쉽게 고개 숙이지 않을 개성있는 인재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만들었다.
200년 군벌의 최대 세력이었던 관동군의 원소를 관도의 대전에서 격파하여 위나라의 기반을 만들었다. 조조는 어려서부터 책을 즐겨 읽었으며,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고대 병법가의 저술을 연구하여 손자병법에 주석을 붙인 위무주손자라는 저술을 남겼다.
뚝심TTUKSSIM : 년도는 214년, 215년 , 217년 등으로 오류 수정합니다. 예전에 만들어 둔 영상이라 오류가 많네요.
권이 : 법정 순위를 보고 웃고 갑니다
이주형 : 최고의 책사는 순욱이지
K2 : 얘가 잘 못 알고 있는 부분을 짚어줌
1. 조조
조조는 예술, 병법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나, 성격상 다소 독선적인 경향이 있다.
자기 주장이 강한 곽가의 말을 경청한 이유는 서로 뜻이 잘맞는 사이였기 때문이지, 의외로 경거망동하여 생사의 위기를 겪은 적이 숱하게 많다.
필요한 간언을 해준 정욱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항상 그 결과가 좋지 않았고, 패할 때 마다 '곽가만 있었다면' 드립을 날려 자신의 실책이 아닌 것으로 포장한다.
2. 방통
아무것도 보여준게 없는데, 와룡봉추의 수식어 만으로 꿀빨고 있는 희대의 거품
3. 제갈량
적벽대전, 남만정벌 등에서 신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지만, 막상 제갈량이 주축이되는 출사표 이후에서 뇌가 퇴화되었는지 큰 활약을 못한다.
풋내기인 강유한테 털리지 않나, 학소 못 뚫고, 제갈량한테서 풍월을 읊은 곽회한테 마저도 나중에 결국 털린다. 제갈량의 위신을 키워주기 위해 사마의를 라이벌로 세우지만,
사실 사마의는 병사를 다루고 전략을 짜는 것에 능하지 않고, 처세와 내정에 강한 사람이다. 그리고, 제갈량이 엮인 큰 전투들이 대부분 허구라는 점에서 과다 포장된 인물.
4. 주유
주유는 최고의 수군지휘관이다. 그러나, 육지전을 능히 수행할만큼 뛰어나지는 않다. 육지전 경험있는 당시 1세대 장수(정보, 황개, 한당)의 보필을 받지 못하고, 해적 출신들만 중용한 까닭에
조인에게 상당히 쥐어 터졌다.
5. 유비
가문의 유명세를 업은 타 지도자와 달리, 맨땅(동네건달)에서 시작하였다. 다소 지능은 부족한 멤버들을 데리고도 기적의 처세술로, 목숨줄 하나는 질기게 연명한다. 유비의 처세술이야 말로, 당대 최고의 지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잡기새루 : 제갈량 사마의 방통은 닥 쓰리픽이고
제갈공명이 원탑은 맞지
정승환 : 저기 초한지영웅들 리뷰좀 해주세요
휭휭에베베 : 제갈량1위? 거르는게답
빛날흥 : 아 정말ㅋ
이y.s : 50년만에 반쪽형주겨우 얻고 개찐따노릇하던 유비에게 서촉파촉에 한중까지 손에 쥐어준 법정을 9위에 랭크하다니...
소설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사용하는 신묘한 계책은 전부 법정의 계책을 나관중이 스틸했다는거 아시나
참모로써의 능력과 지략만 놓고보면 제갈량과 방통은 명함도 못내밀지
Sander Kim : 정사 좋아하는 사람들은 삼국지연의 읽지 말고 중국사 계속 공부하세요. 삼국지연의는 역사소설입니다. 역사소설을 정사와 비교한다는 건 진짜 그냥 2글자로 무식. 김용 무협지 애호가들이 김용 무협지에서 누가 제일 강하냐를 얘기하는데, 김용 무협지는 허구다..라고 딴지거는 것과 다를 게 없음.
제갈량 부부의 숨은 이야기
제갈량 부부의 숨은 이야기
K ND : 채모 나 괴월 만 되도, 엑스트라가 아니고, 삼국지에서는 엑스트라 급 인지는 몰라도, 사람 자체로 봐서는, 대단한 집안이었겟죠...
K ND : 제갈량 같은 사람이, 그냥 보통 여자와 결혼했을리가 없죠...
김민서 : 아니 황월영의 목둔이였으면 천통쌉가능이였네 왜 못한겨
이필원 : 또다른 관점의 견해를 듣습니다
하나하나 배우는 것이 좋네요
감사드립니다
고양이네잡화점 :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XIANJIN LI : 제가 여전에 30세 후반때
한 회사에서 일하였는데 내 옆자리에 20대중반 청년이 있었는데 지력은 좀 떨어지고 인물은 처음 보는 사람은 무서울정도로 생겼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시선을 피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뻐보이는거얘요
얘가 까탈스럽지않고 착했어요
황열영은 총명하고 지혜롭고 성품도 훌륭했다하니 공명님이 사랑했을것같아요
명현이 : 요즘 재미있어서 계속 듣고 있네요.
정말 유익합니다~
붉은새우83 : 청화수님 최고!!!!
처음처럼 : 전.후가 연결되는 스토리를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 주시니 정말 이해가 빠릅니다..항상 감사합니다~~~
남창호 : ㅎ ㅎ ㅎ.제미있네요
신삼국지 장비 조차도 공손하게 만든 최강의 책사 방통 - 등장
책 읽어 드립니다 삼국지 설민석 41분 8초 장면 방통 등장
41분 ~ 43분 장면에 소개된 신통방통 방통입니다 ㅎㅎ
방통이 일찍 전사하지 않고, 유비가 방통의 말을 들었다면 아마 유비는 일찍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ㅜㅜ
최고의 명장 방통의 등장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실력으로 판단해야 하는 이유.
일을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영상.
※ 위 영상은 교육용으로 제작되었으며 전체영상은 IPTV 또는 웨이브에서 시청가능합니다.
- 신삼국지 또는 삼국지 58회 영상입니다.
방통에 관한 위키백과 내용
방통(龐統, 179년 ~ 214년)은 중국 후한 말 유비 휘하의 정치가로 자는 사원(士元)이며 형주 남군 양양현 사람이다. 별호는 봉황의 새끼라는 의미의 봉추(鳳雛)이다. 인물평의 대가이면서도 제왕을 곁에서 모실 인물로 여겨졌다. 익주를 탈취할 것을 제안하여 유비의 입촉을 수행하였다. 낙성을 포위 공격하던 중 유시에 맞아 젊은 나이로 죽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추남에, 낙봉파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목차
1. 생애
1.1 작은 날개
1.2 서촉으로
1.3 상중하책
1.4 봉황 추락
2. 특징 - 인물평의 대가
3. 평가
4. 사서 외의 이야기
4.1 세설신어
4.2 삼국지연의
...
1. 생애
1.1 작은 날개
어린 시절 순박하고 둔하여 알아봐주는 이가 없었는데도 삼촌 방덕공만은 중하게 여겼다. 18살이 되어 방덕공과 친밀했던 사마휘에게 평가를 받으러 갔다. 사마휘는 영천군 사람으로 청아하면서도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사마휘는 나무 위에서 뽕을 따고 방통은 아래에 앉아 밤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사마휘는 방통을 높게 평했고 이로써 점차 이름이 알려져 남군에서 공조(功曹)로 일했다.
남군은 주유가 조인을 몰아내고 점유했다가 유비가 다스리게 되었다. 방통은 계양군 뇌양현령으로 전임됐는데 잘 다스리지 않아 면직되었다. 노숙과 제갈량은 방통을 촌구석이 아닌 주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비가 직접 만나보고는 큰 그릇이라 판단해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삼았다. 친밀하게 대우 받음이 제갈량에 버금가서 얼마 안 가 제갈량과 아울러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에 올랐다.
1.2 서촉으로
방통이 유비를 설득하길 "형주는 황폐해졌고 동쪽에는 손권이, 북쪽에는 조조가 있어 정족지계(鼎足之計), 즉 세발솥 다리의 계획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현재 익주는 부유해서 인구와 병마, 산출되는 물자가 매우 많으니 이를 취해서 대사를 펼쳐야 합니다." 라고 했다. 유비가 "현재 나에게 있어 물과 불 같은 자는 조조요. 조조가 쪼이면 나는 풀어주었고, 조조가 사나우면 나는 인자했고, 조조가 농간을 부리면 나는 진실로 대했소. 매번 조조와 반대로 행동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작은 이유 때문에 천하의 신의를 잃는 것은 취할 바가 아니오." 라고 답하자 방통은 "난세는 한 가지 방법만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약하면 겸병하고 혼매하면 공격하는 것은[3] 오패도 했던 일입니다. 어긋난 도리로 가지되 바른 도리로 다스리고, 유장에게도 의(義)로써 보답하여 큰 나라에 봉한다면 어찌 신의를 저버렸다 하겠습니까? 오늘 확보하지 않으면 끝내는 다른 사람의 이익만 될 뿐입니다." 라고 재차 청했다. 유비가 마침내 행하였다.
211년(건안 16년) 유비가 익주목 유장의 요청에 따라 한중의 장로를 정벌한답시고 촉으로 들어갔다. 제갈량은 남아서 본거지를 진수(鎭守)하고 방통은 유비를 수행했다. 유장이 광한군 부현으로 나와 환대하였다. 장송, 법정, 방통이 병력을 소모할 것 없이 여기서 바로 유장을 잡자고 권하였지만 유비는 이제 막 타국에 와서 은혜와 신의를 드러내지 못했다며 중대한 일이므로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1.3 상중하책
유장은 성도로 돌아가고, 유비는 가맹현으로 올라간 후 한중을 치려 했다. 방통이 유장부터 무찔러야 한다며 상·중·하책을 제시했다. “상책, 은밀히 뽑은 정예병들을 데리고 밤낮으로 내달려 곧장 성도를 습격하십시오. 유장은 무략이 없을 뿐더러 대비도 없을 테니 대군으로 들이닥치면 한번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중책, 양회와 고패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력한 병사로 관두(關頭)를 지키고 있습니다. 듣건대 이들은 장군을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여러 차례 간언했다 합니다. 장군께서는 그들에게 형주가 위급하여 구하러 간다 알리고 행장을 꾸려 돌아가는 척 꾸미십시오. 그들은 틀림없이 좋아하며 가벼운 차림으로 만나러 올 것입니다. 그대로 그들을 붙잡고 그 군대를 차지하여 성도로 향하십시오. 하책, 백제성으로 물러나 형주와 연대하여 서서히 일을 강구하십시오. 선택 가능한 수는 이상과 같으며 만일 망설이기만 한다면 장차 큰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유비는 중책을 추진하여 민심부터 휘어잡았다. 212년,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고 성도로 남진하였다.
1.4 봉황 추락
지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유비는 부성에서 대연회를 개최하였다. 술을 차리고 음악을 울리며 즐거워하자 방통이 “남의 나라를 침공하고 즐거워한다면 어진 사람의 군대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술에 취하여 “주나라 무왕의 군대가 주(紂)를 토벌하며 앞에서는 노래 부르고 뒤에서는 춤을 추었으니 어진 사람이 아니겠구려? 경의 말은 맞지 않소. 당장 일어나 나가시오!”라고 노여워하였다. 방통이 머뭇거리며 물러났다. 유비가 곧 후회하여 돌아올 것을 청했다. 방통이 원래 자리로 돌아와 태연히 먹고 마셨다. 유비가 방금 전에 누가 잘못했는지 물었다. 방통은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한 것이라 대답했고 유비는 크게 웃으며 처음처럼 연회를 즐겼다.
계속 진군하여 유순, 유괴, 장임이 방어하는 낙현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약 1년이 지난 214년 유시(流矢)에 맞아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비가 몹시 애석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훗날 방통의 아버지는 의랑(議郞)을 거쳐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으며, 방통은 관내후에 추봉되고 260년(경요 3년)에 정후(靖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2. 특징 - 인물평의 대가
인물 평가를 잘하는 한편 인재 육성에도 힘썼다. 남군공조 시절 매양 타인을 치켜세우는 바가 실제 재주에 비해 과해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이유를 묻기에, “천하가 무너지고 아름다운 도리가 황폐화되고 착한 사람은 적고 악한 사람이 많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바야흐로 풍속과 도리를 바로 세우고자 합니다. 고운 말로 칭송하지 않는다면 그 명성이 흠모하며 본뜨기에 부족할 것이고, 흠모하며 본뜨기가 부족하다면 선한 일을 하는 자도 적을 것입니다. 뽑은 열 명 중에 다섯 명은 아니더라도 나머지 다섯 명을 얻어 세상의 교화를 높이고 뜻있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분발하게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라 답하였다. 그 명성이 오나라에 퍼졌다.
210년, 남군태수 주유가 숨을 거두었다. 그 시신을 동오로 옮기고 귀환하는데 육적·고소·전종 등 많은 사람들이 오군의 서문인 창문에 모여 전송하였다. 방통은 ‘육적은 빠른 발의 힘을 가진 말’이고, 고소는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곳까지 갈 수 있는 소’라고 평하였다. 어떤 이가 육적이 더 낫다는 뜻이냐고 물어보자 “말은 빠르더라도 한 사람만을 태울 뿐입니다. 소는 하루에 300리를 가면서 어찌 한 사람의 무게만을 나르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전종에 대해서는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는 것은 여남의 번자소(樊子昭)와 유사하며 비록 지력은 많지 않아도 역시 한 시대의 훌륭한 인물’이라 평하였다. 육적과 고소가 ‘천하가 태평해지면 방통과 더불어 사해의 인사들을 논해보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모두와 깊은 친교를 맺고 돌아갔다.
3. 평가
방덕공은 방통의 싹을 알아보고 봉추라 칭하였다. 사마휘는 방통과 면담해보고는 "방덕공은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방통은 실로 훌륭한 덕을 지녔다."라 감탄하였다. 어느 날, 유비가 사마휘에게 세상일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사마휘는 "저같이 견식이 모자란 유생이 어찌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자가 준걸인데, 근래에는 복룡(숨어있는 용)과 봉추가 있습니다."라 답하였다. 복룡은 제갈량이고 봉추는 방통이다.
방통이 오나라에 있을 때 고소가 “경은 사람을 알아보기로 유명한데, 저와 경을 비교하면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물었다. 방통이 스스로 평하기를, “세속을 도야(陶冶)하고 인물을 품평하는 것은 제가 경만 못합니다. 제왕의 비책을 논하고 의복(倚伏)의 요체를 파악하는 것은 제가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소가 그 말에 만족해하며 친근히 대했다.
유비가 방통을 뇌양현령에서 면직시키자 노숙이 유비에게 글을 보내 "방사원은 고작 백 리나 다스릴 자가 아닙니다. 치중이나 별가(別駕)를 맡겨야만 비로소 인걸의 재능을 펼칠 수 있습니다." 라 했다. 제갈량도 이에 동의하였다. 제갈량은 ‘방통과 요립은 초 지방의 우수한 인재로서 대대로 전해질 제왕의 사업을 보좌하여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라 하기도 하였다.
장존은 본래 방통과 의견이 달랐다. 전사한 방통을 유비가 찬탄하자 장존은 “방통이 비록 충성을 다했던 몹시 아까운 인물이긴 합니다만 천하의 올바른 도리는 어겼습니다.”라고 하였다. 유비는 방통이 살신성인을 이뤘다고 화를 내며 장존을 면직시켰다.
양희는 방통을 ‘미덕과 맑고 고상한 기품이 빛났다.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내놓고 가슴에서부터 충정을 발현하였다. 의리와 도덕의 모범이 되어 자신을 희생해 은덕을 갚았다.’고 평하였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인물 평가와 경학, 책모가 뛰어나 형주 사람들은 그를 고아하고 준수한 자[高俊]라 했다. 위나라의 신하들과 비교하자면 순욱에 비길 만하다.’고 했다.
부손은 방통을 "재지(才智-재주와 지략)가 뛰어난 영웅(英雄-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지만 기량(사람의 재능과 도량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불완전하다." 말했다.
... 자세히보기 : https://ko.wikipedia.org/wiki/방통
출처 : 위키백과
#컨뱅
#컨텐츠뱅크
#ContentsBank
컨텐츠뱅크- ContentsBank : ※ 본 영상은 신삼국지 드라마 58회의 일부내용을 비평과 교육 목적으로 편집하였습니다.
신삼국지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실제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전체 영상은 IP티비 또는 웨이브에서 영상을 구입하셔서 정주행 가능합립니다.
- 유튜브 처음시작할때 올린영상이라 배경음악에 크게 신경쓰지 못하고 볼륨조절 실패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
신삼국지 드라마에서 방통은 성격도 좋고 지략도 좋아 최고의 책사라고 생각합니다
정병욱 : 치통 근육통 방통
부릉가 : 그는 인재였으나 하는거 1도없이 갔습니다
다빈치 : 가히 예형 저리가라 할 정도의 망나니 성격 ㅋ
석봉원장 : 장비도 참을성이 다 있었네요
ᄏᄏ : 제갈량이 후방보급과 내정을 담당하고
방통이 전장지휘와 전선관리를 했으면 촉도 할만했는데
말만 양쪽날개라고 하고 그 인재를 재대로 관리하지못한 유비의 능력이 거기까지이기도 하고
촉에서 방통정도되는 인재를 얻기라도 했어야하는데 잃기만하고 얻은게없음
· : 간손미 어디 안가네 손건쉑ㅋㅋㅋㅋㅋㅋㅋㅋ
류재하 : 장비 : 나다 ㅋㅋㅋㅋㅋㅋ
이하하으하하하 : 비지엠 죵나 걸리적거리네 ㅋㅋㅋ
PRESSO RAISON : 방통이 낙봉파에서 안죽었으면
형주에 방통이나 공명 둘중하나는 있을것이고
그럼 관우의 뻘짓또한 예방했을테고
그렇게되면 촉이 쇠퇴하는일없었을듯
어떻게보면 유비의 뻘짓이 나비효과가됨
중국 삼국지 지략가 지력 순위 TO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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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 년도 수정★
20. 여몽
214년 여몽은 형주 공략에 나서 오나라가 장사・계양 2개 군을 영토로 편입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15년에는 합비를 공격하다가 장료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빠진 손권을 구했고, 217년에는 도독이 되어 오나라를 쳐들어온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노숙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대도독이 되었다.
219년 촉나라의 관우가 위나라의 조인이 지키던 번성 공략에 나서자 여몽은 그 틈을 타서 관우의 배후를 공격해 형주를 점령하고 관우를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여몽은 용감할 뿐 아니라 지략도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여몽과 관련해서는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고사성어도 전해진다.
중국 삼국지 지략가 지력 순위 TOP20
본 순위는 등장빈도와 활약상 중심으로 정사보다는 삼국지연의를 기반으로 만들었습니다.
6. 곽가
여포 토벌 때에는 곽가의 진언으로 여포를 생포하였다. 여포에게 패하여 조조 진영에 머물렀던 유비가 원술을 공격하러 떠났다가 이후 반기를 들자 원소가 도우러 올 것을 염려하는 조조를 설득하여 유비 토벌에 성공하였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고 양자강 건너의 허창을 습격하려 하자 곽가는 손책에게 원한을 산 사람들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된다고 예언하였고, 이내 손책은 오군 태수 허공의 자객에 의해 상해를 입고 죽음에 이른다.
조조는 그를 두고 “오직 곽가만이 나의 뜻을 잘 안다”고 말할 정도였다.풍토병으로 쓰러져 38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조조는 적벽전투에서 패배한 후 곽가의 부재에 대해 더욱 안타까와 했다고 한다.
7. 주유
손견이 죽은 후 손책을 섬겨 양쯔강 하류 지방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08년 조조가 화북을 평정하고 형주로 진격해 오자, 손권을 설득하여 군사 3만을 주면 조조를 격파하겠다고 장담하였다. 마침내 손권을 설득하여 오나라 대도독으로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여 적벽대전에서 화공으로 위군을 대파하였다. 익주를 점령하여 촉을 병합하고 조조의 위를 점령하여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주유가 구상한 천하 이분지계이다.
8.육손
어린 나이로 뛰어난 지략을 지녀 여몽과 함께 공안을 함락하고 관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뒷날 유비가 복수를 위해 군사를 동원했을 때도 노장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침착하게 작전을 짜 촉의 40여 진지를 불살라 촉의 대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이끌었는데, 모두 그의 생각이었다.
진수는 육손에 대해 “충성이 매우 지극하여 나라를 걱정하다 죽었으니 사직의 신하라고 할 만하다”고 평하였다.
9. 법정
촉나라 책사중 천상계에 속하는 제갈량과 방통을 제외하고는 가장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받는다.유비가 익주를 점령할 때 뛰어난 정치력과 상황 판단 능력으로 유비가 익주를 얻게 만드는 1등 공신이다.
조조와의 한중 쟁탈전에서도 조조가 책임자로 하후연과 장합을 두고 갔음에, 법정이 말하길
"조조가 일거에 장로를 항복시키며 한중을 평정시켰음에도 급히 돌아간것은 내부에 우환이 닥쳤을 것이며, 하후연, 장합의 재략은 우리 장수들보다 나은점이 없으니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할 수 있습니다"
라며 상중하의 계책으로써 천금같은 기회를 놓칠순 없다며 유비를 설득하며 필승을 자신한다. 정군산 전투에서 반객위주법 이라는 기책을 사용하여 하후연 참살에 결정적 공헌을 한다.
유비 진영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제갈량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육손에게 완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제갈량은 "아 법효직(법정의 자)만 있었더라도 폐하의 출정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한스럽구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10. 순유
여포 토벌, 관도 전투 등 조조의 중요한 전투 대부분에 군사로써 종군하여 조조에게 항상 적절한 조언을 하였다. 또 실제 전투에서도 관도 전투의 전초전인 백마 전투에서는 원소군의 기병대장 문추를 죽이는 공적을 세웠다. 당대 최고의 군사로써 삼국시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이라 불리우는 관도대전에서 백마, 연진, 치중, 오소 전투 등 그야말로 모든 전장에서 그 상황에 맞춰 적절한 계책을 내놓습니다.
적벽 전투에서도 순유는 적이 화공을 준비하려는 책략을 알아채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하라고 조언하였으나, 이미 승리를 자신하던 조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사태는 순유가 걱정한 대로 화공에 의해 조조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삼국지 정사의 저자 진수는 위나라 참모들을 편찬할때, 우선적으로 순욱, 순유, 가후를 한편으로 묶고, 그 다음으로 나머지 참모들을 한편에 묶습니다. 즉 이 세명을 조조군 최고의 3대 참모로 꼽은 것 입니다.
11. 정욱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던 때 순욱과 함께 견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연주에 모반의 기운이 퍼지면서 남아 있는 성 3곳을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때 그는 여포가 보낸 진궁의 공격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면서 조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된다.
이후 연주의 기반이 흔들려 심약해진 조조는 원소에게 가족들을 볼모로 바치며 밑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정욱이 이를 다그쳐 거절시키고 조조를 분발하게 만들었다. 조조에게 귀순한 유비를 미리 처치해 두라고 조언하기도 하는 등 안목있는 계책을 내놓는데, 나중에 조조가 유비에게 서주의 원술을 공격하게 하면서 병사를 빌려준 데 대해 배반할 것이라고 곽가와 함께 진언했고 이 또한 맞아떨어졌다.
12. 노숙
노숙은 일찍부터 손권에게 천하 통일을 도모하기를 권했으며, 유비와 동맹을 맺어 함께 조조에 맞설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208년 유표가 죽은 뒤에 직접 당양의 장판으로 가서 유비를 만나 동맹 체결을 주도했고, 조조가 강동을 공격해왔을 때에는 항전을 주장했다. 그리고 주유를 보좌하여 적벽에서 조조의 군대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주유의 병이 위독해지자 주유를 대신해 병사들을 통솔했다. 노숙은 강릉에 주둔하다가 육구로 옮겼는데, 그가 다스린 곳은 평안하여 병사와 주민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13. 전풍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설득하여 조조의 후방을 공격할 것을 간언했지만, 원소는 아들 병을 핑계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지팡이로 땅을 치며
“대저 우연한 기회는 얻기도 어려운데, 어린아이의 병으로 기회를 잃을 줄이야! 애석하도다!”라고 하면서 원소의 무능함과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한탄했다고 한다. 관도대전에서 패하고 원소가 돌아오자 어떤 사람이 옥에 갇힌 전풍에게 원소가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왔으니 당신은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풍은 원소가 이겼으면 살았겠지만 졌으니 죽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전풍은 원소가 내린 칼로 자결하기에 앞서, 슬피 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슬퍼할 것 없다. 장부가 세상에 나와 주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다.”라고 말한 후 죽었다.
14. 저수
전풍과 함께 원소 진영 최고의 책사로 평가받는다. 전풍 등과 같이 원소가 조조보다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원소를 설득해 헌제를 업으로 맞아 제후에게 호령할 것을 권했지만, 계책을 따르지 않아 조조에게 빼앗겼다.
가장 중요한 조조와의 관도대전 중에 여러 차례 원소에게 수비에 치중할 것을 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투옥되었다. 원소가 크게 패한 뒤 조조에게 포로로 잡혔다. 조조가 두터운 예로 대했지만, 완강히 투항을 거부했다. 군영(軍營)에서 말을 훔쳐 원소에게 돌아가려다가 잡혀 죽임을 당했다.
15. 조조
종합적으로 모든 면을 봤을 때에는 삼국지 세계관의 압도적 원탑임이 분명하지만 순수 지력만을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조조를 하위에 두었습니다. 실제 조조의 강점에는 본인 스스로의 능력도 뛰어나지만 개인적으로 그를 당대 최고의 자리로 올려준 요인은 순욱, 순유, 가후, 곽가와 같이 자기주장 강하고 누구 앞에서도 쉽게 고개 숙이지 않을 개성있는 인재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만들었다.
200년 군벌의 최대 세력이었던 관동군의 원소를 관도의 대전에서 격파하여 위나라의 기반을 만들었다. 조조는 어려서부터 책을 즐겨 읽었으며,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고대 병법가의 저술을 연구하여 손자병법에 주석을 붙인 위무주손자라는 저술을 남겼다.
뚝심TTUKSSIM : 년도는 214년, 215년 , 217년 등으로 오류 수정합니다. 예전에 만들어 둔 영상이라 오류가 많네요.
권이 : 법정 순위를 보고 웃고 갑니다
이주형 : 최고의 책사는 순욱이지
K2 : 얘가 잘 못 알고 있는 부분을 짚어줌
1. 조조
조조는 예술, 병법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나, 성격상 다소 독선적인 경향이 있다.
자기 주장이 강한 곽가의 말을 경청한 이유는 서로 뜻이 잘맞는 사이였기 때문이지, 의외로 경거망동하여 생사의 위기를 겪은 적이 숱하게 많다.
필요한 간언을 해준 정욱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항상 그 결과가 좋지 않았고, 패할 때 마다 '곽가만 있었다면' 드립을 날려 자신의 실책이 아닌 것으로 포장한다.
2. 방통
아무것도 보여준게 없는데, 와룡봉추의 수식어 만으로 꿀빨고 있는 희대의 거품
3. 제갈량
적벽대전, 남만정벌 등에서 신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지만, 막상 제갈량이 주축이되는 출사표 이후에서 뇌가 퇴화되었는지 큰 활약을 못한다.
풋내기인 강유한테 털리지 않나, 학소 못 뚫고, 제갈량한테서 풍월을 읊은 곽회한테 마저도 나중에 결국 털린다. 제갈량의 위신을 키워주기 위해 사마의를 라이벌로 세우지만,
사실 사마의는 병사를 다루고 전략을 짜는 것에 능하지 않고, 처세와 내정에 강한 사람이다. 그리고, 제갈량이 엮인 큰 전투들이 대부분 허구라는 점에서 과다 포장된 인물.
4. 주유
주유는 최고의 수군지휘관이다. 그러나, 육지전을 능히 수행할만큼 뛰어나지는 않다. 육지전 경험있는 당시 1세대 장수(정보, 황개, 한당)의 보필을 받지 못하고, 해적 출신들만 중용한 까닭에
조인에게 상당히 쥐어 터졌다.
5. 유비
가문의 유명세를 업은 타 지도자와 달리, 맨땅(동네건달)에서 시작하였다. 다소 지능은 부족한 멤버들을 데리고도 기적의 처세술로, 목숨줄 하나는 질기게 연명한다. 유비의 처세술이야 말로, 당대 최고의 지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잡기새루 : 제갈량 사마의 방통은 닥 쓰리픽이고
제갈공명이 원탑은 맞지
정승환 : 저기 초한지영웅들 리뷰좀 해주세요
휭휭에베베 : 제갈량1위? 거르는게답
빛날흥 : 아 정말ㅋ
이y.s : 50년만에 반쪽형주겨우 얻고 개찐따노릇하던 유비에게 서촉파촉에 한중까지 손에 쥐어준 법정을 9위에 랭크하다니...
소설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사용하는 신묘한 계책은 전부 법정의 계책을 나관중이 스틸했다는거 아시나
참모로써의 능력과 지략만 놓고보면 제갈량과 방통은 명함도 못내밀지
Sander Kim : 정사 좋아하는 사람들은 삼국지연의 읽지 말고 중국사 계속 공부하세요. 삼국지연의는 역사소설입니다. 역사소설을 정사와 비교한다는 건 진짜 그냥 2글자로 무식. 김용 무협지 애호가들이 김용 무협지에서 누가 제일 강하냐를 얘기하는데, 김용 무협지는 허구다..라고 딴지거는 것과 다를 게 없음.
제갈량 부부의 숨은 이야기
제갈량 부부의 숨은 이야기
K ND : 채모 나 괴월 만 되도, 엑스트라가 아니고, 삼국지에서는 엑스트라 급 인지는 몰라도, 사람 자체로 봐서는, 대단한 집안이었겟죠...
K ND : 제갈량 같은 사람이, 그냥 보통 여자와 결혼했을리가 없죠...
김민서 : 아니 황월영의 목둔이였으면 천통쌉가능이였네 왜 못한겨
이필원 : 또다른 관점의 견해를 듣습니다
하나하나 배우는 것이 좋네요
감사드립니다
고양이네잡화점 :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XIANJIN LI : 제가 여전에 30세 후반때
한 회사에서 일하였는데 내 옆자리에 20대중반 청년이 있었는데 지력은 좀 떨어지고 인물은 처음 보는 사람은 무서울정도로 생겼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시선을 피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뻐보이는거얘요
얘가 까탈스럽지않고 착했어요
황열영은 총명하고 지혜롭고 성품도 훌륭했다하니 공명님이 사랑했을것같아요
명현이 : 요즘 재미있어서 계속 듣고 있네요.
정말 유익합니다~
붉은새우83 : 청화수님 최고!!!!
처음처럼 : 전.후가 연결되는 스토리를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 주시니 정말 이해가 빠릅니다..항상 감사합니다~~~
남창호 : ㅎ ㅎ ㅎ.제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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